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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on Yeoin: Green Room
무대에 오르기 전, 아직 아무 일도 시작되지 않은 듯 보이는 시간이 있다. 공연을 앞둔 이들이 잠시 머무는 대기실을 뜻하는 ‘그린룸(Green Room)’은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는 무대와 달리, 각자가 호흡을 가다듬고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며 다가올 순간을 준비하는 장소다. 이 전시는 바로 이 무대 뒤의 시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대기실’은 단순히 무언가를 기다리는 장소가 아니다. 도약을 앞둔 존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움직이고 머무르며, 변화에 필요한 힘을 축적하는 심리적 공간이다.
연여인은 그동안 집과 방, 숲과 같은 장소를 기억과 경험이 축적되어 이룬 내면의 풍경으로 다루어 왔다. 유년의 기억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와 익숙한 사물, 인물과 동물은 그의 화면에서 현실의 질서를 벗어나 낯선 관계를 맺는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가 하나의 장면 안에 겹쳐지고, 내부와 외부,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느슨해진다. 작가에게 공간은 사건이 벌어지는 배경 이라기보다 인물의 심리가 바깥으로 확장된 또 하나의 구조에 가깝다.
이번 전시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한다. 종이를 접고 또 접고, 나뭇가지를 하나씩 모으며, 물고기를 어딘가로 옮긴다. 누군가는 숲속을 헤매고, 누군가는 출구 앞에 멈춰 서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웅크리거나 잠든 채 자신의 시간을 보낸다. 이들의 행동은 명확한 목적이나 완결된 서사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적이고 사소하며 때로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도약 이전의 행동’이다. 도약은 뛰어오르는 단 한 번의 순간 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수없이 반복되는 몸짓과 실패, 망설임과 준비의 시간이 존재한다. 당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듯 보이는 움직임들이 쌓이면서 이전과는 다른 상태로 나아갈 가능성이 만들어진다. 연여인이 바라보는 것은 변화가 완성된 이후의 모습이 아니라,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변화가 시작된 순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품에 등장 하는 ‘접힘과 펼쳐짐’은 중요한 조형적 언어가 된다. 종이를 접으면 보이던 표면은 안쪽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나 한 번 생긴 접힌 자국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종이를 다시 펼친 뒤에도 그 흔적은 남아 다음 형태를 구성하는 일부가 된다.
기억과 경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지나온 것은 사라지는 대신 접히고 겹쳐져 현재의 감각 안에 남는다. 변화한다는 것은 이전의 자신을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새겨진 흔적과 함께 또 다른 형태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작업 속 캐릭터들은 결핍된 존재 라기보다 아직 다른 모습이 될 가능성을 간직한 상태에 가깝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무엇이 되어 가고 있는가’이다.
연여인의 작업에서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양가적 감각 역시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나타난다. 숲과 나무, 둥지와 방은 인물을 보호하는 은신처인 동시에 언젠가는 벗어나야 할 경계가 된다. 편안해 보이는 실내에는 분절된 신체가 놓이고, 온몸이 상처로 가득한 아이는 평온해 보인다. 출구를 가리키는 표지와 닫힌 문, 숲 사이의 틈, 날아가는 새와 화면 밖에서 뻗어 들어오는 손은 안식과 불안, 머무름과 이동이라는 상반된 상태를 한 화면 안에 공존시킨다.
이러한 양가성은 그 자체로 종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약을 앞둔 존재가 통과해야 하는 불확실한 상태를 드러낸다. 익숙한 곳에 머물고 싶은 마음과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감각,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과 아직 알 수 없는 바깥을 향하려는 움직임이 동시에 존재한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변화의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린룸(Green Room)’이라는 제목은 더욱 분명한 의미를 얻는다. 무대에 오르기 전 배우가 같은 동작과 대사를 되풀이하고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듯, 연여인의 인물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다음 장면을 준비한다. 그 준비는 반드시 효율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다. 실패하고 되돌아가며, 같은 행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도 한다. 그러나 겉보기에 무의미한 반복조차 도약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의 일부다. 기다린다는 것은 멈추어 있다는 뜻이 아니다.
용산문화재단과 디아 컨템포러리의 협력으로 마련된 이번 전시는 연여인이 구축해 온 회화 세계에서 ‘도약 이전의 시간’이 어떻게 이어지고 변주되어 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구성하였다. 관람객은 화면에 반복되는 몸짓과 접히고 겹쳐지는 형상, 인물들을 둘러싼 방과 숲을 따라가며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미 변화하고 있는 존재들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삶에는 아직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이 있다. 이전의 자리에서는 이미 조금 멀어졌지만 다음 자리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한 시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연여인의 화면에서 이러한 시간은 공백도, 단순한 유예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을 모으고, 지나온 것을 새롭게 배열하며, 다음 움직임을 가능하게 하는 시간이다.
문이 언제 열릴지, 그 너머에 어떤 장면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작가 역시 그 이후를 섣불리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도약하기 직전의 존재들이 머무는 하나의 방을 열어 둔다. 그 안에서 누군가는 종이를 접고, 누군가는 나뭇가지를 모으며, 누군가는 축축하고 비린 생명을 다른 곳으로 옮긴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어쩌면 바로 그 순간, 수많은 반복과 망설임이 축적되는 시간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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